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섭정]](Baillis) 통치의 시대 === *''' 보두앵 5세 ''' 보두앵 4세의 유언이 받아들여져, 조카인 보두앵이 왕위에 올라 [[기름 부음]]을 하니 그가 바로 [[보두앵 5세]]다. 작금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레몽 3세가 거절했던 섭정의 지위를 다시 받아들였는데 놀랍게도 별다른 반대가 없이 취임했다. 왕국은 살라흐 앗 딘의 오라에 짓눌리는 와중에 가뭄이 온 나라를 강타해 작황조차 매우 좋지 않았다. 길거리 촌부조차 휴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가뭄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살라흐 앗 딘 역시 마찬가지고, 공격적인 확장으로 인한 아이유브 제국 내의 여러 반란 징후가 포착되자 휴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편, 우트르메르인들에게 진짜 위험은 동로마 제국의 계속되는 쇠퇴에서도 터져나왔다.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는 조카 [[알렉시오스 2세]]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한 자였는데 막장 정치로 외세의 침략을 받자 반란이 터져 결국 시내로 끌려나간 폭군은 오른손이 잘리고 눈이 뽑히게 되었으며 온갖 모욕을 당하다 끔살당했다. 콤니노스의 중흥 100년을 1년만에 말아먹은 인물로 그의 조카 [[이사키오스 2세]]가 즉위하여 앙겔로스 황가를 창설하나 준비되지 않은 인물이 동로마 제국을 접수하니 주변국에게 밀리고 밀려 결국엔 동로마 제국의 행정 체계인 [[테마 제도]]가 박살이 나버렸다. 장부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0만에 가까웠던 동로마 제국은 자신의 군대의 크기조차 제대로 파악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사태는 후에 4차 십자군의 병크 짓을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이렇듯 [[소아시아]]의 기독교의 영향력은 풍선 터지듯이 없어져 버렸다. 반대 급부로 무슬림이 득세하니 그 여파는 예루살렘까지 미쳤다. 한동안 십자군 국가들은 이러한 사건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미치게 될 영향력을 감지하지 못했다. 왕국이 진짜 망테크를 타려고 했는지 이전의 보두앵 4세는 문둥병이라는 디버프를 가지고 있었기에 일찍 죽어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그 뒤를 이은 어린 왕 보두앵 5세가 1186년 8월 아크레에서 1년 만에 죽었다. 늘 허약했으므로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선왕 보두앵 4세의 유언의 내용이 모호했다. 만일 어린 왕이 죽을 경우, 누가 후계자가 될지에 대해 서유럽의 네 지도자(교황,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영국)가 중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섭정으로서 직무를 맡아보도록 명시되어 있었고 후계자 후보로는 여동생 시빌라 공주와 이복 여동생 이사벨 공주가 유력했다. 보두앵 5세가 죽을 당시 조슬랭 3세와 함께 레몽 3세가 옆에서 임종을 지켰다. 왕이 서거하자 조슬랭은 레몽에게 본거지인 티베리아스로 돌아가 그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왕국의 귀족들을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레몽이 보기에도 조슬랭이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아 그 계획에 동의했다. 그러나 레몽이 별다른 의심없이 티베리아스로 가자 조슬랭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어린 왕의 유해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성묘 교회]]에 재빨리 유해를 안장했다. 그런 다음 티레와 베이루트를 점령하고는 조카 시빌라를 여왕으로 선포해버렸다. 레몽은 귀족들을 티베리아스로 소집하는 와중에 그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에 응하여 온 성주들이 티베리아스에 모여 있는 동안 시빌라의 인장이 찍힌 즉위식 초청장을 받았다. 그 파벌은 이미 강력한 동맹자들을 얻은 후였다. 매파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를 좌장으로 시작하여, 기욤 드 티레의 라이벌인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레스 도베르뉴(Héraclès d'Auvergne)와 몇 년 전에 레몽에게 모욕을 당한 제라르 드 리포르(Gérard de Ridefort)가 이끄는 성전 기사단 역시 지원을 약속했고, 시빌라의 남편 기와 깽판치고 다니던 [[르노 드 샤티용]]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리라는 낌새를 알아채고는 즉시 그들의 편에 섰다. 하지만 구호 기사단의 단장 로저 드 물랭(Roger de Moulins)은 시빌라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보두앵 4세 앞에서 레몽을 지지하기로 맹세했던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성을 다하여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러한 양심의 가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므로 자신들의 얼굴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로저를 개무시로 일관하며 즉위식 준비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당시 왕국의 가장 고귀한 기장들인 [[레갈리아]], 즉 [[성십자가]] [[롱기누스의 창]] [[왕관]] [[셉터|홀]] [[보주]] [[성유|성유병]] 등은 성십자가를 제외하고는 잠겨진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상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3개의 열쇠 구멍이 있었는데. 하나는 총대주교가 갖고 있었고, 나머지 두 개는 두 기사단의 단장이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구호 기사단장 로저는 혐오감으르 드러내며 자신의 열쇠를 다비드 탑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가 그 열쇠를 기어이 찾아 결국엔 상자를 열었다. 시빌라의 남편인 기 드 뤼지냥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어진 즉위식에서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가 기에게는 왕관을 씌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시빌라가 몸소 남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들이 성묘 교회를 떠나자 성전 기사단장인 제라르는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자신이 예전에 받은 모욕을 앙갚음 했노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그의 말은 역사에 남아 좀 스러운 개인적 야망이 왕국에서 여전히 중요한 동기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냈을 뿐이다. 이토록 막장극이 펼쳐지는 혼란기를 거쳐 [[기 드 뤼지냥]]이 예루살렘의 왕을 계승하였다. *''' 시빌라 & 기 ''' 시빌라의 즉위에 반대했던 성주들은 이제 다음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은 이사벨 공주의 남편인 옹프루아 드 토롱(Onfroy IV de Toron)을 왕국의 통치자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에는 유감스럽게도 옹프루아는 편안히 살기를 바라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지에서 몰래 빠져나와 기에게 가서 새로 즉위한 그 부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 인해 레몽이 갖고 있던 모든 카드를 써버렸고, 심지어 그의 강력한 지지자들조차 이제 남은 선택은 판을 엎어 버리는 내전을 치르거나 현 상황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개평이나 받아야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에 대부분의 귀족들은 왕국 외부의 살라흐 앗 딘이라는 조건이 고려되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 왕에게 경의를 표했고 소수의 귀족들은 다른 십자군 국가로 망명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